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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1500년전인 백제 무녕왕 14년(서기514년)에
가규(可規)스님이 초창(初創)하였다고 한다. 그러니 신라
혜공왕(765~780)때 창건한 큰절 송광사보다 250년 정도
먼저 세워진 셈이다.
송광사 제2세 국사이신 진각국사<진각혜심 眞覺慧諶:
(1178~1234)께서 이곳에 주석(駐錫)하시며 1226년에
종문(宗門)의 최고 저서인 섬문염송집(禪門염頌集)
30권을 펴내어 광원유포(廣遠流布)하였다 하여 그 뒤부터
광원암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다.
그 뒤로는 1309년에 혜초(惠超)스님이 중창하였고, 1576년에
영윤(靈允)스님의 중건, 1710년에 정열(淨悅) 시습(時習)
기향(起香)스님의 적취루(積翠樓) 창건 및 1713년 중수, 1712년 치순(致淳) 지익(智益)스님의 중수 및 회관
(會觀) 망혜(望惠)스님의 단청(丹靑), 1771년에 출징(出澄) 치초(致初)스님의 공루(空樓) 중건, 1890년에 취암경은
(翠巖景恩) 용선(龍船)스님의 중수, 1917년 용선· 원명(元明)스님의 남익실(南翼室) 중수, 1936년 향운(香雲) 월고
(月皐) 스님이 체실(體室) 조실(祖室) 왕각(王閣)을 중수하였다 한다.
1948년의 여순반란사건과 1950년의 6.25동란의 수난을 겪으면서 큰절 송광사가 대화재로 소실되어 1958년 5월
3일에 큰절 불사를 위해서 광원암을 훼철(毁撤)하였고, 그뒤 30여년간 덤불 속에 묻혀 빈터만 남아 있었다.
그 뒤 1992년(임신;壬申)에 현봉(玄鋒)스님의 원력으로 복원 중창하여 본채와 원조당(圓照堂) 그리고 해우소를 갖추었다.
이곳에 주석했던 큰스님들은 부지기수라 자세히 쓰기가 번거롭다.
와월(臥月) 봉암낙현(鳳巖樂賢) 우담홍기(優曇洪基) 침연장선(枕淵章宣) 금명보정(錦溟寶鼎) 경붕(景鵬) 경해(鏡海)
원해(圓海) 포우행성(布雨幸性) 화성주흔(華性湊炘) 한운(漢雲) 취암(翠巖) 예운(禮雲) 만성(晩惺) 우송선명(友松
善明) 용암진수(龍巖桭秀) 응하학수(應夏學守) 호연(浩然) 서월(西月) 용연두문(龍淵斗文)스님 등등....
근대의 1897년에는 금명보정스님께서 이곳에 강원을 열어 학인이 50여명이나 살았다 하며 그뒤에 1935년에 염불당
(念佛堂)을 신설하여 대중이 모여 정업(淨業)을 닦았다고 한다.
암자의 바로 뒤에는 1234년에 입적한 진각국사의 사리(舍利)를 모신 부도(浮圖)인 원조탑(圓照塔)이 있다. 이 탑의
탑호(塔號)는 그 때 고려 고종(高宗)이 내렸고 이규보(李奎報)가 쓴 진각국사비명(眞覺國師碑銘)에는 그 위치를
‘광원사(廣遠寺) 북록(北麓)’<광원암 뒤의 북쪽 언덕>이라 기록 되어 있다. [진각국사의 비는 전남 강진군 성전면
월남리 월남사지(月南寺址)에 세웠는데, 지금은 파손되어 비신 하반부만 남아있다<보물313호>]
그리고 년에 조성한 아미타여래상과 1823년에 조성한 후불탱화(金魚; 度鎰 勉淳 天如 有定)와 1879년에 조성한
지장탱화(金魚; 雲波就善 妙英 斗三 天禧 琪演 一俊 玲受)는 송광사 성보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광원암 앞에는
작은 연못이 있는데 여름에는 수련(睡蓮)이 피어난다. 수초(水草)사이로 헤엄치는 물고기들을 바라보면 망중한
(忙中閑)의 무아경(無我境)에 빠져든다.
찾아가는 길은 큰절에서 탑전으로 가서 못미쳐 돌다리<피안교;彼岸橋>를 지나 바로 왼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올라가면 넓은 편백숲이 나오는데 탑전에서 약 500m쯤 곧장 가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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