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는 전라남도 순천시 조계산 자락에 자리 잡은 천년 고찰로 호남의 명산 중 하나인 조계산과 더불어 주암호의 푸른 물결이 외호를 하고 있다.
조계산의 원래 이름은 송광산으로 송광(松廣)이라는 이름에는 몇 가지 전설이 있다. 하나는 18명의 큰 스님들이 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친다는 것으로, ‘송(松)’자를 파자(破字)하면 '十八(木)+公(18명의 훌륭한 인물)'이 되고, ‘광(廣)’은 불법광포(佛法廣布, 불법을 널리 펼친다)의 뜻으로 해석한 것에서 유래하였다. 또 하나의 전설은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 스님이 정혜결사(定慧結社)의 도량으로 터를 잡으실때 모후산(母后山)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더니 지금의 국사전(國師殿)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鵄落臺 현 진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불렀다고 한다. 이 전설을 토대로 육당 최남선(六堂 崔南善, 1890~1957)은 송광의 뜻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라 하여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불렀다. 마지막으로 산에 소나무가 많아 ‘솔메’라 불려 송광산이라 불리우다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자연스럽게 변경되었다는 것이다.
송광사는 신라 말(8세기경) 혜린(慧璘) 선사가 작은 규모로 절을 창건하였다. 『송광사지(松廣寺誌)』에 이때 가람의 규모는 100여 칸의 전각과 삼사십 명의 대중들이 살았으며, 절 이름을 ‘길상사(吉祥寺)’라 하였다. 또한 절 이름이 7처 9회의 화엄설법 제2회에 설법을 하였던 문수보살의 또 다른 이름이므로 보조국사의 중창 이전까지 화엄종에 속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세월이 흘러 고려 제17대 인종 때(1122~1146)석조(釋照) 대사가 쓰러져 가는 길상사를 중창하고자 원력을 세웠지만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명종 27년(1197) 천진(天眞)·확조(廓照) 스님이 보조국사의 명을 받들어 폐사 지경에 이른 길상사를 복원하였다. 신종 3년(1200)에 보조국사가 절 이름을 ‘길상사’에서 ‘정혜사(定慧社)’로 고치고, 이곳에 주석하였다. 희종 원년(1204)에 이르러 법당과 승방 80여 칸을 완공하고 낙성법회를 성대하게 봉행했다. 이에 희종은 산 이름을 ‘조계(曹溪)’, 절 이름을 ‘수선(修禪)’이라 하고 친필로 된 사액(賜額)을 내렸다.
희종 6년(1210)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제자인 진각국사 혜심(眞覺國師 慧諶, 1178~1234) 스님이 주지가 되면서 선풍(禪風)을 크게 진작 시키자, 스님의 문하로 들어오고자 많은 사람이 몰려들어 절을 증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에 강종(康宗)은 신하들을 보내 절을 크게 중창케 하였다. 이후 제3세 청진국사 몽여(淸眞國師 夢如,?~1252) 스님 이후 제15세 홍진국사(弘眞國師) 스님에게 이르기까지 송광사의 역사는 전란 등으로 인해 기록이 사라져 자세한 역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건국되고 나옹 혜근(懶翁 惠勤, 1320~1376) 왕사의 법을 이은 고봉 화상(高峰 法藏, 1350~1428)이 정종(定宗, 재위 1398~1400)의 후원으로 쇠퇴해 가던 가람을 중창하기 시작하였고, 고봉 화상의 뜻을 계승하여 중인(中印) 선사께서 중창 불사를 완성하여 90여 칸을 증축하였다고 한다.
이후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 왜군들의 침입으로 인하여 인근의 화엄사를 비롯한 여러 사찰이 큰 피해를 본 것과 달리 송광사는 수각(水閣), 임경당(臨鏡堂), 보조암(普照庵), 천자암(天子庵) 등 일부의 화재 피해를 보았다. 이에 1606년 응선應禪화상의 주도로 전란으로 타버린 전각과 암자들을 차례로 중건하였다. 전란의 여파로 오랫 동안 사찰을 유지하기 어려울 만큼 위기가 찾아왔지만 1609년 부휴선사(浮休 善修, 1543~1615)의 후원으로 조사전, 천왕문을 비롯하여 낡고 비가 새던 전각들에 대한 보수가 이루어졌다.
왜란이 종결된 이후 송광사는 호남은 물론 전국적인 수선(修禪)과 교학(敎學)의 대선방과 대강당이 되어 수많은 고승 대덕이 주석하였다. 대표적으로 취미 수초(翠微 守初, 1590~1668), 백암 성총(栢庵 性聰, 1631~1700), 무용 수연(無用 秀演, 1651~1719)스님 등이 주석하면서 선풍(禪風)을 드높였다.
1842년에는 뜻하지 않은 화재로 대웅전을 비롯한 경내 서북부에 위치한 전각이 불에 탔다. 용운 처익(龍雲 處益, 1813~1888) 대사가 중창을 시작하여 이때의 화재를 복구하는 데 1856년까지 14년이 소요됐으며, 2,150여 칸의 건물이 중건되었다. 1922년부터 1928년까지 당시 주지 설월(雪月 龍燮, 1868~1938)과 율암(栗庵 贊儀, 1867~1929) 스님에 의해 낡은 건물을 고치고 기와를 교체하는 등 중수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5월 공비 토벌 과정에서 큰 화재가 발생하여 대웅전, 설법전, 박물관 등 경내 중심부가 불에 타는 엄청난 피해를 보았다. 이로 인해 수백 년간 사중에 간직해 왔던 보조국사 가사를 비롯한 많은 성보(聖寶)가 잿더미로 변하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고 1955년부터 2차에 걸쳐 진행된 천일관음기도회를 통해 금당(錦堂 在順, 1890~1973) 스님과 화주 취봉(翠峰 昌燮, 1898~1983) 스님의 원력으로 다시 불사를 일으켜 불에 탄 전각들을 차례로 복구하였다.
이후 1969년 조계총림이 설립되면서 초대 방장 구산(九山 秀蓮, 1909~1983) 스님께서 승보종찰다운 도량을 가꾸어야 한다는 원력에 당시 주지인 현호(石林 玄虎) 스님과 사부대중이 함께하여 1983년부터 1990년까지 8년여에 걸쳐 대웅전을 비롯하여 30여 동의 전각과 건물을 새로 짓고 중수하여 도량의 모습을 일신하고 승보종찰로서의 위용을 갖추어 오늘에 이르렀다. 8차 중창 불사와 아울러 특기할 것은 외적인 불사와 함께 내적인 불사 즉, 사상 불사를 해야 한다는 뜻을 세워 1987년 보조 사상 연구원을 발족하여 보조 사상 선양에 진력하였다.
그 뒤 구산 스님의 뒤를 이어 방장이 된 일각(廻光 壹覺, 1924~1996), 보성(梵日 菩成, 1928~2019), 현봉(南隱 玄鋒, 1949~2024), 현묵(鞭羊 玄黙, 1950~) 스님이 지금도 계속하여 산문 진입로의 옛길 복원 및 건물 보수 불사를 계속 진행하고 있어 현재의 장엄한 모습을 이루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