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사 안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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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휴(浮休)의 수제자격(首弟子格))인 벽암대사(碧巖大師의 법(法)을 이은 벽암대사의 상족(上足)으로
취미 수초(翠微 守初)와 백곡 최능(白谷處能)의 두 사람을 열거할 수가 있으니, 두 제자(弟子) 모두 부휴의
문중(門中)을 빛낸 탁월한 인물(人物)들이었다.

취미(翠微)는 선조 23年 명신(名臣)이던 성삼문(成三問)의 후예로 경성 성균관(京城 成均館) 북쪽 명류(名流)의
가문(家門)에서 태어났다. 성(姓)은 물론 성씨(成氏)이었고 자(字)는 태혼(太昏)이었다.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일찍부터 출가(出家)할 뜻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형이 그의 출가를 허락하지 않자 어느날 밤 그는 몰래 성벽을
넘어 어느 암자로 도망갔고 설악산에 머물고 있던 경헌장로(敬軒長老)밑에 들어가 삭발을 하고 출가의 뜻을 이루었다.

만력(萬曆) 34年에는 두류산(頭流山)으로 들어가 당대 명성(當代 名聲)을 날리던 부휴선사를 찾아 뵙고 그에게서
수계(受戒)를 하였다. 이때 부휴선사는 자신의 제1제자(第1弟子)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에게 그가 큰 그릇이 될
人物임을 알고 다음과 같이 취미스님을부탁하였다 한다.

어느날엔가 이 사미(沙彌)가 반드시 깨달을 것이나 나는 이미 늙고 더욱 병까지 들어 세상에 오래 머물지 못할 것이다.
그대에게 부탁하노니 그를 장차 잘 보호하여 주기를 바란다.
B 취미스님은 그후 여러 곳의 고승들을 역방(歷訪)하였으며 서울에 올라가 명사들과 교류(交流)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불문(佛門)뿐만 아니라 외학(外學)에 대한 지식도 넓히어 유학자(儒學者)들과의 대담(對談)을 즐겼다. 그러나,
그는 철저히 고승인 벽암대사 따랐다. 벽암스님이 관동(關東)을 편력 할 때 그를 따라 관동을 수행했고 그가 남쪽으로
내려오자 취미 역시 남쪽으로 내려갔다. 인조(仁祖) 7년 옥천(玉川)에 절를 개당(開堂)하고 많은 제자들을 길러
내기도 했다.

유명한 상국 장유 장웅(相國 張雄)는 희고상인(希古上人)으로 하여금 북한산(北漢山)에 절을 짓게 하고 특히 그를
청(請)하였으나, 굳이 이를 물리치고 춘파(春坡)를 천거할 정도로 그의 德行은 고매한 데가 있었다. 그의 명성이
높아지자 전국의 많은 승려들이그를 청했고 이에 따라 그는 관북으로 또는 해서 등지(海西 等地)로 편력하며 많은
사람들을 감화시켰다. 병자호란(丙子胡亂)이 일어나자 그는 다시 남쪽으로 내려와 영남과 호남등지로 전전하면서
법음(法音)을 전하기도 했다. 어느 때인가는 선가(禪家)의 중요한 전적(典籍)으로 여겨지는 선문염송을 읽다가 책을
덮어 버리고는 <무릇 모든 언어 문자는 이미 다 되어 좁쌀알과 같아져 버렸으니, 거기 또 무슨 맛이 남아 있겠는가>
하고 선의 경지를 읊었다고 한다.

현종(顯宗)9年 정월(正月) 주변에 모인 승려들에게 영북으로 갈 것을 고(告)하고2月에 오봉(五峯)의 삼장사(三藏寺)
로 옮겨 갔다. 이미 병세가 드러나기 시작하자 6月에 자신이 기거하던 방(房) 돌면서 무량수불(無量壽佛)을 염(念)
하다가 서쪽을 향해 앉아 그대로 입적하였다. 세수(世壽0 79歲이었으며 시가집인 취미대사시집「翠微大師詩集」 1卷이
남아 오고 있다. 그를 따르던 高弟만도 32名이나 되었고 그 중 벽암 학성, 설파 민기등의 유명한 제자들이 있어 영세한
조선조(朝鮮朝)의 승단(僧團)을 빛내었다.

특히 그가 전통적 한국불교의 특색인 禪·敎를 一致시키려 했고 나아가 성도와 정토의 二門을 合一시키려 한 점이나
그 信行에 있어 정토왕생을 주장하고 타력신앙을 주장한 점은 사상사적으로 주목할 만한 점이라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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